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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초현실주의 거장이며 괴짜 화가 살바도르 달리

by 르비쥬 2022.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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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스페인 초현실주의 거장으로 꼽히며 괴짜 화가라 불리는 살바도르 달리. 수많은 명작과 또 수많은 기행을 남긴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내고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는 20세기 초현실주의의 대가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와 작품에 대한 확신으로 끊임없이 독특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탄생시킨 살바도르 달리에 대해 알아보자.

 

달리는 스페인 북동쪽 1904년 2월 11일에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공증인이었다. 달리의 형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뇌수막염으로 죽었고 부모님은 달리가 형의 환생이라고 믿으며 같은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달리에게 부담으로 작용했고 형으로서 달리로서 살아야 했지만, 자신은 죽은 형이 아닌 살아있는 달리라는 것을 항상 증명하고 싶어 했고 이것은 그가 애정 결핍에 시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괴짜 기질이 많았던 그는 6살 때부터 그림에 재주를 보였다. 그가 6살 때인 1910년에 그린 그의 고향 스페인 카탈란 지방의 피케레스를 그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작은 엽서에 그린 이 그림에서도 화가로서의 재주가 느껴진다. 달리는 1916년 12살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어린 시절의 그림들은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가족은 피케레스에서 조용하고 아름다운 어촌마을 카다케스에 있는 바닷가 별장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고 그 환경은 훗날 달리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큰 도시에서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기 원했던 달리는 16살에 아버지의 도움으로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게 된다. 1921년 그의 나이 17세에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달리의 아버지는 어머니 여동생과 재혼한다. 그것은 달리에게 충격이었고 깊은 상처를 안은 채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왕립 미술학교에 진학한 달리는 이미 학교 안에서 기괴한 행동과 의상 때문에 유명한 상태였다. 유난히 자신을 꾸미고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달리는 당시 대유행이었던 영국식 댄디 스타일의 우아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달리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는 자신이 존경하던 스페인의 고전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오마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리는 이 시기 특히나 입체파 화풍에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신기하게도 당시 마드리드에선 입체파를 그리는 작가가 없었다. 때문에 달리의 독특한 화풍은 눈에 띄었고 많은 관심을 받는다. 특히나 1923년 그려진 'Late Night Dreams'는 입체파와 미래파의 영향이 모두 어우러진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그의 첫 제명은 1923년에 학생들의 시위에서의 역할 때문이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만 또다시 퇴학당하게 된다. 1926년 졸업시험 직전 졸업 면접시험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퇴학은 젊고 당당한 달리를 수그러트리거나 조심스럽게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 파리로 간 그는 자신이 존경하던 당시 유명한 파블로 피카소를 만나게 된다. 피카소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달리를 소개했고 그 영향으로 달리의 작품엔 피카소의 화풍과 큐비즘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1927년을 기점으로 달리의 화풍은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 달리는 프로이트와 로트레아몽 책을 즐겨 읽었고 두 사람 모두 사람의 '무의식'을 다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밝혀내려 한 학자이고 로트레아몽은 무의식을 작품 속에 녹여낸 19세기 시인이다. 알 듯 말 듯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의식의 세계는 달리에게 새로운 영감이 된다.

 

이 시기 달리의 작품에선 의미가 모호한 기호와 상징이 많아지고 현실적인 이미지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는 당시 유럽 사회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던 초현실주의 화풍의 모양새를 띤다. 초현실주의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이전의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관에 대한 회의로 탄생한 화풍으로 이미지의 비합리적인 배치에 의해 무의식적인 마음의 창조적 잠재력을 드러내려는 예술과 문학에서의 전위 운동을 말한다. 아무 생각 없는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전혀 말이 되지 않는 대상을 말이 되지 않게 배치해서 표현한다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의 시초라 알려진 앙드레 브레통은 그의 초현실주의 선언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우리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그런 장면이나 현상을 콜라주나 심벌들을 통해 시각적이나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술가들은 이런 운동을 하려 했을까? 그 이유는 1차 세계대전 후 기존 사회의 가치에 대한 혼란이 당시 유럽에서 팽창하기 시작하며 기존의 경직된 논리적 사고와 문화를 부정하고 그런 경직됨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달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부분 초현실주의자는 공산주의자였는데 달리가 파시스트들을 동정하는 발언과 행동을 하며 수많은 초현실주의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1934년 그의 동료이자 리더였던 앙드레 브레통이 동료들을 불러 달리를 쫓아내려 한 적이 있었다. 브레통은 달리의 히틀러 찬양과 같은 초현실주의 운동에 반대하는 행동들이 모두 유죄이고 파시스트를 동경하는 달리의 그런 행동 때문에 그를 퇴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물론 달리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만의 믿음과 행동과 방식으로 작품을 계속해나간다. 심지어 피카소와는 다르게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를 자주 만나 지지했다고 한다.

 

그는 비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했다. 1929년 달리는 자신의 운명적인 뮤즈 갈라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당시 초현실주의 시인이던 폴 엘두아드와 결혼 한 유부녀였다. 하지만 10살 연하의 달리를 알게 되며 빠르게 사귀게 되고 결국 남편 엘두아드와 이혼하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이 둘은 결혼한다. 하지만 그녀는 달리의 아티스트로서의 경력에 지대한 기여와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그의 매니저 역할과 연인의 역할도 아주 왕성하게 했다. 달리와 갈라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이상한 커플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갈라는 달리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달리는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초현실주의 화풍을 계속해서 실험하던 달리는 1931년 자신의 걸작 '기억의 지속'을 만든다.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마치 꿈을 그려놓은 듯한 모습 속 낯설고도 익숙한 상징물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특히나 작품 속 흘러내리는 시계는 수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달리는 꿈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무의미하고 애매모호한 형상들에 집중했다. 평상시 우리의 무의식 사이 떠도는 소재들은 꿈속에서 마구 뒤엉킨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달리 작품 속의 이미지들도 복합적이고 무의미한 형태를 띠었다. 이 작품의 특유 분위기와 상징은 초현실과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세상 사람들에게 너무도 강렬하게 각인되었고 초현실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말년에 들어서 달리는 무대 연출이나 미술관 천장화, 입체 작품 등 스펙트럼도 다양해졌다. 하지만 76세가 되던 1980년 중풍의 영향으로 달리는 붓을 잡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더는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 시기엔 오랜 뮤즈였던 갈라와 불화가 이어졌는데 정작 갈라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달리는 삶에 대한 의지마저 잃게 된다. 1984년 그의 저택에 화재가 발생해 친구들이 그를 구조하지만, 일부에선 이 화재가 달리 스스로 방화를 저지른 자살 시도로 보기도 한다. 1989년 초현실주의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세 블록 떨어진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다. 수많은 명작과 또 수많은 기행으로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평가는 달리가 살아있던 당시에도 지금에도 엇갈린다. 때로는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거장으로 때로는 명성과 돈에 굶주린 화가로 불린다. 하지만 아무도 그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의 대가였단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항상 장난꾸러기였던 달리는 자기 스스로와 작품에 대한 확신으로 끊임없이 독특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탄생시켰고 흐트러지지 않는 정교한 묘사와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만들어진 그의 화풍은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며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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