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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색채의 마술사, 진정한 사랑꾼 초현실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

by 르비쥬 2022.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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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마술사 또는 진정한 사랑꾼이라 불리며 특유의 몽환적인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린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초현실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은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유대인 화가 샤갈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동화적이고 자유로우며 그만의 특유의 환상적인 특색을 보인 마르크 샤갈은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실제 사물을 그리는 입체파와는 달라 오히려 표현주의 화가 또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샤갈은 아내와의 사랑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고 그녀가 떠난 후에도 아내를 그리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정도로 아내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사랑꾼이었다.

 

마르크 샤갈은 1887년 6월 러시아 제국의 비테프스크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샤갈의 아버지는 청어 상인 밑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야채를 팔았다. 어린 샤갈은 가난하지만 소박한 유대인 예배당과 시골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화가의 꿈을 키운다. 다른 유럽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유대인은 차별받는 시민이었고, 그때 당시 유대인은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10대 후반 샤갈은 친구의 신분증을 빌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미술 학교에서 2년간 미술 공부를 하게 된다. 솔직히 샤갈은 고전주의 미술 관점에서 보면 표현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없는 학생이었다. 샤갈의 학생 때의 작품을 보면 그의 실력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1년 후 초기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던 스승 레온 박스트를 만난다. 그는 화가뿐 아니라 장식예술 무대디자인까지 하는 드물게 미술로 성공한 유대인이었다. 그런 박스트는 샤갈에게 좋은 롤모델이었고 유대인도 화가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1910년 샤갈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유대인 막심 리버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우연히 샤갈의 그림을 본 막심 리버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프랑스의 모든 유학비용을 지원하게 된다. 막심 리버는 당시 러시아 출신의 유태인 변호사로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유대인의 인권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막심의 후원으로 파리의 유학길에 오른 샤갈은 미술적으로는 굉장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파리의 대세는 앙리 마티스와 피카소였는데 그들은 '에꼴 드 파리'라는 화파까지 만들어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었다. 마르크 샤갈 역시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앙리 마티스에게서는 야수파를 피카소에게는 큐비즘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키워나간다. 이때 샤갈의 화풍이 완성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자유분방함과 새로움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으며 성공적인 작품 활동을 하던 샤갈은 그만의  특유에 내성적인 성격과 언어적인 장벽 등의 어려움과 낯선 환경에 적응의 어려움 때문에 외로웠던 샤갈은 고향과 사랑하는 여인 벨라를 몹시 그리워하며 향수병에 시달린다. 1913년 샤갈과 각별한 시인 아폴리네르의 도움으로 베를린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치며 명성을 얻은 샤갈은 벨라가 있는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간다. 사실 벨라는 샤갈과 같은 러시아 출신에 유대인이었지만 상황은 달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보석상을 운영하는 부자였고 그녀는 부유한 집안의 막내딸로 당시 러시아 최고 대학이라 불리는 모스크바 게리 에르 여자대학교 출신의 엘리트였다. 가난한 화가인 샤갈을 벨라의 집에서 반대했지만 둘은 몰래 연애하며 사랑을 이어 나간다. 그리고 샤갈이 화가로 성공을 거두자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벨라와 결혼을 위해 비테프스크에 머물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국경은 봉쇄가 된다. 세상은 혼란했고 화가로서 활동하기에도 힘들었던 샤갈은 벨라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설득 끝에 1915년 7월 벨라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고향에서 신혼생활을 이어 나가며 이듬해 딸 '이다'가 태어나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 시기 샤갈의 그림을 보면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게 느껴진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였다. 1917년 1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당시 러시아 제국의 몰락하고 이후 사회주의 혁명인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다.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혁명정부는 소수 민족 차별부터 없애는 정책을 추진하자 샤갈에게 좋은 기회처럼 보였다. 그리고 샤갈은 비테프스크 미술학교 교장 자리까지 올라갔다. 고향을 파리 같은 예술의 도시로 만들고 싶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혁명 세력은 샤갈의 그림과 미술 정책을 사회주의 선전용으로 이용하고 싶어 했지만 샤갈이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자 반혁명적 예술가로 낙인찍혀 목숨마저 위태로워졌다. 샤갈은 1922년 러시아를 탈출해서 가족과 함께 베를린을 거쳐 파리로 돌아온다. 다행히 이미 유럽에서 성공한 화가 샤갈의 파리 생활은 큰 어려움은 없었다. 파리에서 가족들과의 첫 10년은 샤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다시 자유롭게 붓을 잡을 수 있었고 국제적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미술 상인 베른 하임과의 계약으로 그의 재정적 문제도 사라졌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되어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퇴폐 미술전을 열어 샤갈과 전위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조롱하며 탄압했다. 나치 독일은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어 파리뿐만 아니라 유럽을 혼란에 빠뜨렸다. 샤갈의 가족은 1941년 나치 독일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인생 최대의 비극이 찾아온다. 1944년 미국으로 이주하고 3년 후 벨라가 알 수 없는 감염으로 세상을 떠나고 샤갈은 1년간 붓조차 들기 힘들어 작품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땐 벨라에 대한 그리움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그림을 주로 그렸지만, 곧 벨라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리기 시작하며 그림의 분위기는 점차 밝아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남프랑스에 정착하며 샤갈 인생에서 가장 안정적인 예술 활동을 이어간다. 말년에는 주로 구약성서를 주제로 한 다수의 작품을 남겼고 스테인드글라스 태피스트리 도자기 작업등 98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샤갈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화가였다. 샤갈은 자신이 유대인임을 잊지 않고 살았다. 유대인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대다수 인류가 공감하는 사랑, 전쟁의 슬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이런 보편적인 감성이 샤갈 특유의 낭만적인 색감과 만나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고 사랑받는 화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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