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술이야기

다재다능한 천재 화가 미켈란젤로

by 르비쥬 2022. 9. 2.
반응형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으로 불리는 다재다능한 천재 화가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이며 건축가이자 화가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산치오와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불리는 다재다능한 천재 화가 미켈란젤로는 조각, 건축, 회화, 시 등 많은 업적을 남긴 예술가이다. 종합 예술인이라 불리어도 될 만큼 여러 방면에 능했던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평생 라이벌 관계였고, 공통점이 많은 두 거장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비교되며 소개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어린 시절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는 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의 작은 마을 카프레제에서 태어났다. 병약한 어머니는 6살 때 일찍 세상을 떠나고 미켈란젤로는 유모의 손에 길러지게 되는데, 그 유모의 남편은 바위를 캐서 가공해 파는 석수장이였다. 어린 미켈란젤로는 돌멩이와 조각용 끌과 망치를 가지고 놀면서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되고 이것은 후에 그가 조각가 되는 것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피렌체는 상공업이 매우 발달해 있었고 마을 행정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상업 거래에 필요한 계약서를 공증하는 공증 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몰락한 귀족 가문이었던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공부로 할 수 있는 직업을 갖길 원했지만,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돌멩이만 만지고 그림만 그리는 미켈란젤로가 못마땅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예술가에 대한 평가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예술가가 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혼내고 때려도 미켈란젤로는 고집불통이었고 결국 포기한 아버지는 미켈란젤로를 그의 나이 13세에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보낸다. 기를란다요는 당시 피렌체에서 굉장히 유명한 화가였고 그의 제자로 들어가지만, 스승의 능력이 성에 차지 않아 1년 만에 그만두고 나오게 된다. 그리고 회화는 자기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미켈란젤로는 조각이 내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한편 기를란다요는 세기의 천재를 제자로 들였다가 두고두고 미켈란젤로와 비교를 당하게 되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기를란다요의 화방을 나온 미켈란젤로는 조각가 베르톨도 디 조반니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다. 베르톨도는 당시 피렌체의 군주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세운 예술학교의 책임자였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메디치 가문의 수장으로 예술을 사랑하고 젊은 예술가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15세의 소년 미켈란젤로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렌초의 배려로 그는 메디치 가문에서 몇 년 동안 지내게 되며 파격적인 예술적 지원과 학식을 쌓을 수 있는 우대를 받는다. 그러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망하고, 메디치 가문이 큰 위기를 겪게 되자 더는 그곳에 머무를 수 없어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을 떠나게 된다.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다

메디치 가를 나온 후 2년이 지나 미켈란젤로는 다시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작품을 의뢰받게 되어 메디치가를 방문했다가 얻은 아이디어로 잠자는 큐피드 조각상을 고대 로마 조각상처럼 보이게 만들어 판다. 나중에 이 조각상이 고대 로마 조각상이 아니란 걸 알게 된 로마의 리아리오 추기경은 미켈란젤로의 솜씨에 감탄하며 그의 첫 후견인이 되고 미켈란젤로는 로마에 입성하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게 된 프랑스 대사 랑그로사이오 추기경이 자신의 무덤을 장식할 조각을 의뢰하고, 그렇게 해서 만든 조각상이 바로 '피에타'이다. 미켈란젤로는 24세에 '피에타'로 순식간에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감탄하고 칭송했지만 정작 이 작품을 만든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누군지도 몰랐다. 이에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새벽에 몰래 숨어들어 가 성모 마리아의 옷깃에 자기 이름을 조각한다. 당시 종교가 유럽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자신이 만든 작품이라고 성모 마리아의 옷깃에 자기 이름을 적는 짓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성당 밖을 나온 미켈란젤로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날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웠고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창조한 신은 어떠한 창조물에도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순간 부끄러움을 느낀 미켈란젤로는 자기 행동을 후회하고 다시는 어떤 작품에도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이렇게 '피에타'로 로마에서 스타가 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금의환향한다. 당시 피렌체는 군주였던 메디치 가문이 끌어내려지고 피렌체 공화국이 세워졌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정부로부터 이 승리를 기념할만한 조각품을 만들어 줄 것을 의뢰받고 3년의 시간을 거쳐 1504년 '다비드'를 완성한다. '다비드'는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을 말하는데 그 다윗이 돌멩이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을 통해 압제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쟁취한 피렌체 공화국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담긴 작품이다. 문제는 이게 메디치 가문을 욕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메디치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성장한 미켈란젤로의 입장에서는 작업하기가 매우 껄끄러웠다. 이렇게 유명한 두 작품을 만든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에 머물며 많은 작품을 의뢰받기 시작한다. 이후 유명해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오 2세의 의뢰로 천장화를 제작하게 된다. 회화를 좋아하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협박과 같은 의뢰로 '시스티나 천장화'를 완성한다. 그 후 '최후의 심판'이라는 걸작도 만들어내지만, 여전히 미켈란젤로는 회화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후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하는 등 건축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고 그 외에도 메디치 성당의 설계와 그에 딸린 조각들, 로렌 치아나 도서관,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등 그가 건축에 참여한 작품이 많다.

 

죽음

미켈란젤로는 1564년 르네상스 말기까지 생존해 88세까지 활동한 장수 예술가이다. 노년에 접어들어 시력이 약해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촉각에 의지해서 죽기 직전까지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조각가이자,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 그가 남긴 작품은 후대에도 많은 영향과 영감을 주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