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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차가운 추상의 거장 피에트 몬드리안

by 르비쥬 202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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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추상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며 차가운 추상의 거장으로 꼽히는 피에트 몬드리안은 20세기 현대 미술을 이끈 최고의 화가 중 하나이다. 하얀 배경에 강렬한 색상 오로지 선과 면으로만 이루어진 독특한 화풍의 몬드리안 작품은 오늘날 디자인 패션 인테리어 등 다양한 현대 문화에 영향을 준다. 몬드리안의 작품은 수직과 수평, 그리고 강렬한 삼원색을 사용해 절대적인 질서로 이루어진 단순 명료한 작품으로 차가운 추상의 대표 화가이다. 빈센트 반 고흐와 야수파 그리고 입체파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예술가이며 추상화의 초기 화가에 속하며 네덜란드 구성주의 회화의 거장인 몬드리안에 대해 알아보자.

 

187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피에트 몬드리안은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와 화가였던 숙부에게 그림을 배웠다. 풍경화를 즐겨 그리던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어린 시절 몬드리안도 집 주위 자연경관이나 정물화를 그리곤 했다. 초창기 몬드리안의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당시 많은 네덜란드 화가들처럼 그의 고향 풍경을 주로 그렸지만 1911년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을 접하면서 몬드리안의 작품이 크게 변화한다. 1908년부터 1913년까지 같은 대상을 그린 나무 연작을 보면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그의 화풍과 생각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908년 '붉은 나무'는 누가 봐도 나무임을 알 수 있게 나무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나뭇가지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둘러싼 배경의 색은 붉은색과 하늘색으로 강렬한 대비를 이루어 마치 나무가 살아있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입체파를 처음 접한 1911년에 제작한 '회색 나무'에서는 나무를 그린 것은 알 수 있지만 그 형태가 훨씬 간단해졌다. 1912년에 제작한 '꽃피는 사과나무'는 제목을 봐야만 나무를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1913년 나무 연작의 마지막 작품인 '나무'를 보면 최소한의 색과 선으로만 나무를 표현해 제목을 확인하고도 나무의 형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색도 줄고 선도 단순해지면서 마지막 그림은 대상을 알 수 없다. 몬드리안은 이렇게 형태와 색채를 간략화하는 과정을 통해 사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몬드리안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영향은 입체파를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은 것도 있지만 시대적 배경도 있다. 몬드리안이 화가로서 작업을 시작했던 20세기 초반은 사진기의 등장으로 사물을 그대로 그려내는 화풍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사진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당시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능력은 사진을 능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화가들은 사진과 다른 회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징을 찾아야 했고 이 시기 몬드리안은 우리가 보는 사물에서 쉽게 알아보지 못한 사물의 본질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 보이는 것이 화가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몬드리안은 주변 사물의 본질을 찾기 시작했고 대상을 단순화하며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 낸다.

 

1912년 몬드리안은 입체파를 배우기 위해 파리로 건너가 입체파를 연구하기 시작하고 현대미술에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 파리에서 생활하던 1914년 아버지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네덜란드로 문병을 하러 간 몬드리안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네덜란드에 머물게 된다. 이 시기에 몬드리안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몬드리안 스타일의 화풍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1917년 세상을 보이는 데로 그리지 않고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찾고자 했던 몬드리안은 자신과 비슷한 신념을 가진 예술가들과 함께 '데 스틸'이라는 그룹을 만들고 같은 이름의 예술 잡지를 출간한다. 그는 '데 스틸' 잡지에서 자기 작품을 신조형주의라고 규정하고 잡지에 자신의 신조형주의 이론에 대해 게재하였다. '데 스틸'이라는 잡지는 주기적으로 발간되었고 몬드리안은 그 잡지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표현양식을 나타내었다. '데 스틸'에는 중요한 원칙이 있었다. 첫 번째는 수직선과 수평선을 사용할 것. 두 번째는 색의 삼원색 빨강, 노랑, 파랑만 사용할 것. 세 번째는 무채색인 흰색, 회색, 검은색을 사용할 것이다. 그런데 몬드리안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데 스틸' 그룹을 떠나는 일이 일어난다. 1919년 전쟁이 끝난 후 파리로 돌아온 몬드리안은 '데 스틸' 원칙을 바탕으로 계속 추상화 탐구를 지속하지만, '데 스틸' 그룹의 공동 설립자이자 리더인 테오 반 두스버그는 시대가 지나면서 역동적인 느낌을 지닌 사선을 받아들이게 된다. 단순함을 고집했던 몬드리안과 역동성을 받아들인 두스버그 사이에 의견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몬드리안은 '데 스틸' 그룹을 떠나게 된다. 이후 몬드리안은 바우하우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우하우스는 당시 모더니즘을 신봉하던 진보적인 예술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오늘날 산업디자인의 개념을 만든 독일의 예술 학교 바우하우스는 이런 '데 스틸'의 정신을 계승한 것 중 하나이다. 몬드리안이 '데 스틸' 그룹을 떠나게 된 이 일화를 통해 우리는 몬드리안이 얼마나 수직선과 수평선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몬드리안은 1919년에서 1938년까지 주로 파리에서 활동하였고 60대에 그의 작품이 재평가받기 시작하며 미국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이 인기가 높아진다. 그러던 중 1938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나치즘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 영국의 런던을 거쳐 1940년에 뉴욕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 후 뉴욕에서 그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뉴욕에서 생을 마친다. 수직선과 수평선을 숭배했던 몬드리안에게 뉴욕시의 역동적인 분위기와 전경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작품의 제목까지 '뉴욕'이라고 했다. 이 작품은 복잡한 도시 뉴욕에 화려함을 지극히도 간결하고 단순한 선과 색으로 표현하며 완벽하게 그만의 방법으로 정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재미있는 변화가 생기는데, 바로 선에 색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그의 작품을 보면 수직선과 수평선은 무조건 검은색이었다. 선은 무조건 검은색을 고집하던 몬드리안이 뉴욕에 넘어오면서 선에 색을 넣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에서 1940년까지 미국에서 유행했던 음악 장르 중에 부기우기가 있다. 보통 춤곡으로 많이 사용됐던 부기우기는 주로 기타 피아노로 연주되는 빠른 리듬의 음악이다. 재즈와 춤을 좋아했던 몬드리안도 부기우기 음악을 많이 접했고 그의 작업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빅토리 부기우기'는 마름모 캔버스에 여러 가지 재료를 붙여서 만든 콜라주(캔버스에 물감이 아닌 다른 재료를 붙여서 만든 것) 작품인데 이 전에 그의 작품과는 다르게 단순함은 사라지고 빠른 템포와 리듬이 느껴진다. 마치 캔버스 전체가 각각의 다른 색상을 가진 사각형과 함께 템포를 맞춰 움직이는 것 같다. 이 마지막 작품을 끝으로 몬드리안은 1944년 폐렴으로 사망한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추상화가 몬드리안은 다른 작가들과 달리 무엇을 그리냐에 연연하지 않고 철저히 미술의 기본인 선과 색을 통해 시각적 언어를 표현하고자 했다. 몬드리안을 말했다. 미술이란 자연계와 인간계를 체계적으로 소거해 나가는 것이다. 몬드리안의 말처럼 그는 사물의 본질을 단순화하며 추상 화가로서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 낸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디자인, 패션, 인테리어 등 다양한 분야의 현대문화에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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