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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색채의 마술사, 행복의 화가, 야수파의 창시자 '앙리 마티스'

by 르비쥬 2022.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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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마술사 또는 행복의 화가라 불리는 야수파의 창시자 앙리 마티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이다. 그는 특유의 화풍으로 수많은 수식어를 만들어내며 20세기 회화에 혁명으로 평가받는다. 강렬하고 원시적이며 밝고 순수한 색감과 자유롭고 확신에 찬 선, 그리고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형태 등 앙리 마티스는 그만의 확고한 스타일로 많은 예술가의 영감이 되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 손꼽히기도 한다. 일평생 회화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과감한 색과 유려한 선의 표현을 고민했던 화가이자 피카소와 함께 20세기를 수많은 역작으로 물들인 위대한 화가이다.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어딘가 모르게 행복감이 느껴지는데 실제로 마티스는 행복의 화가로 불린다. 화려한 색으로 감정을 표현했던 야수파 스타일의 대표 아티스트 앙리 마티스에 대해 알아보자.

 

1869년 프랑스의 작은 공업도시의 부유한 곡물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20살이 되던 해 맹장염에 걸려 수술하게 되고 지루한 입원 생활을 하던 중 어머니에게 물감과 붓을 선물 받아 그림을 그리되고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다. 퇴원 이후 출근 전 새벽이나 퇴근 후 저녁 시간을 쪼개가며 미술 수업을 받는데 이때 마티스는 미술이 자신의 길임을 확신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생계가 불확실한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한다. 마티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리 미술학교에 다니기 시작한다. 당시 그는 정지된 물체를 그리거나 오래된 명작을 베끼는 등의 딱딱한 방식으로 미술을 배웠다. 이때 그린 그의 그림을 보면 칙칙한 색이 대부분이어서 오늘날의 마티스를 연상하기 어렵다. 실제로 마티스가 대학에 들어가 그린 초기작들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마티스의 그림과 다르다. 점차 마티스는 자신만의 화풍에 눈을 뜬다. 당시 젊은 예술가들은 고흐, 고갱 그리고 세잔으로 대표되는 후기 인상파 작품에 열광하고 있었고 마티스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파리의 대규모 전시회에 예전보다 밝은 색을 사용한 작품들을 내놓았는데 이 작품들이 호평받으며 무명 화가였던 마티스는 점차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때 그린 작품들을 보면 형식에 집착했던 우울한 느낌의 그림들과 달리 붓놀림이 과감해졌고 색채는 밝아졌다. 이후 마티스는 '조지 쇠라'와 '폴 시냑'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고 그들의 작품에서 큰 감명을 받은 그는 그들이 위원으로 속해있는 '독립 예술가 협회'에 작품을 출품하기로 결심한다. 이 협회는 기존 전시회들이 사전심사를 바탕으로 고리타분하게 운영된다는 점에 반대한 진보적인 예술 단체였다. 마티스가 이 협회에 제출한 작품은 '사치, 고요, 쾌락'인데, 이 작품은 마티스가 야수적인 느낌을 드러낸 첫 작품으로 점묘법을 사용하여 색채를 과감하게 표현하여 강한 느낌을 강조한 작품이다. 이후 1906년 그는 '모자를 쓴 여인'을 제작하는데 이 작품은 자신의 아내 아멜리를 유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번에는 점묘법 대신 과감한 붓놀림으로 표현하였지만 강렬하면서도 산뜻한 느낌을 표현한 그의 새로운 스타일은 여전히 강조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본 평론가들은 자연이 가진 아름다운 색을 무시한 채 마음대로 물감을 뒤섞은 색채는 마치 포악한 야수의 울부짖음 같다며 혹평했지만 마티스는 오히려 이 말에 만족해하며 자신의 화풍을 야수파라 부르기 시작한다. 이후 야수파 화풍은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비판도 거셌지만 이런 비판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밝고 순수한 색감과 행복을 그려내는 일에 전념한다. 같은 해 1906년에 한 살롱에서 젊고 유능한 예술가 피카소를 만난다. 당시 피카소는 마티스보다 12살 어린 나이었지만 둘은 금세 강한 라이벌 구도가 된다. 둘 다 프랑스 태생이었고 정물, 여성의 얼굴 같은 비슷한 소재를 다루어 비교가 쉬웠다. 또 둘 간의 차이도 선명했다. 피카소는 상상 속의 대상을 우울하고 심각하게 그렸고 마티스는 자연 속의 대상을 밝고 순수하게 그렸다. 덕분에 입체파와 야수파의 대립 구도는 점점 커졌고 둘의 유명세도 더해졌다. 이후 그의 작품들을 보면 붓질이 보다 부드러워지고 정교해지는데 마티스의 대표작 '삶의 기쁨'을 보면 이 작품은 밝은 빨강과 눈부신 노랑 깊은 초록 같은 풍요로운 색채를 이용하여 아주 선명하고 강렬한 색이 돋보인다. 꽃과 대화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들이 가득한 낙원 속 모습은 마치 이 세상에 없는 천국을 그려 넣은 듯한 환희가 느껴진다. 폭발적인 색채를 지나 평온하고 안락한 분위기의 이 작품은 마티스의 정수로 평가되고 있으며 '미술이란 걱정 없이 편하게 머리를 누일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것'이라는 마티스의 정신이 아주 잘 녹아든 대표작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발표하고 비판은 거셌다. 당시 유럽은 전쟁 위험과 함께 많은 불안과 사회적 문제들이 있었다. 하지만 마티스의 작품은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고 오로지 밝은 분위기만을 담아냈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이후 1910년 러시아 상인이자 남작이었던 후원인 세르게 슈츄킨의 주문으로 '춤'이란 작품을 그렸다. 이 작품은 다섯 명의 사람이 손을 잡고 꼭 강강술래를 하듯이 돌고 있다. 이 작품을 본 비평가들은 질서 없는 그림 촌스러운 색과 구조 조화롭지 않은 선이라며 혹평했지만, 오늘날 이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그림 중 하나다. 파랑, 초록, 주황 이렇게 세 가지 색만 사용했지만 팽팽하게 맞잡은 손과 땅에서 떠 있는 듯한 모습, 그리고 뒤틀린 몸을 통해 상당히 빠르게 회전하는 리드미컬한 춤 동작을 표현했다. 그의 단순하지만 강렬한 에너지와 마티스가 추구하는 유일한 이상 '조화'가 작품에 녹아 있다. 이후로도 마티스는 강렬한 색에 집중한 작품으로 후기 인상주의의 뒤를 이을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오르지만,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창조성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며 이전보다 더 강렬한 작품을 내놓기 시작한다. 1910년대를 전후로 마티스는 자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 시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전쟁은 마티스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지금까지 자신이 선보였던 순수하고 밝은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작품들은 내놓는다. 특히 이 시기 마티스는 자신의 화풍과 당시 주류로 평가받던 입체파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기 마티스는 다시 자신의 밝고 순수한 작품세계로 돌아온다. 이후로는 이전보다 더 밝고 순수한 작품을 고민하며 작품을 그렸고, 다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지만 이 시기 마티스는 1차 세계대전과는 다르게 밝은 그림을 계속해서 그렸다. 사람들은 마티스가 의도적으로 사회 현실을 외면한다고 비판하지만 마티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알았다. 자신이 살던 파리는 함락됐고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는 반 전통에 기초한 입체파와 야수파 같은 작품들을 저질 작품으로 매도하고 독재를 위해 예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당시 마티스는 파리와는 거리가 있는 니스에 있었지만, 파리가 함락되자 주변 지인들은 마티스에게 프랑스를 떠나길 권유한다. 하지만 마티스는 프랑스를 떠나지 않고 니스에 남아 자신만의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전쟁이 끝나고 유럽에 평화가 찾아왔고 마티스는 다양한 시도를 하며 노년에 접어들 때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은 한다. 하지만 마티스는 70이 넘은 나이에 위암 선고를 받고 수술받게 된다. 큰 수술을 거쳐 암의 전이를 막을 수 있었지만, 수술의 여파로 마티스는 휠체어와 병상 생활을 시작한다. 마티스에게 있어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이제 신체적 도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마티스의 행복에 대한 추구는 멈추지 않았다. 마티스는 죽을 때까지 휠체어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더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태였지만 좌절하지 않고 색종이와 가위를 이용해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간다. 마티스는 이 방식을 가위로 그리는 그림이자 조각가의 정교한 작업과 같다고 말할 정도로 만족했다. 이렇게 80이 넘을 때까지 미술에 대한 열정을 표현했던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보다 젊은 화가들의 작품을 열린 자세로 받아들였고 현대 미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 위대한 화가는 결국 1954년 8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프랑스의 따뜻한 해안 도시 니스에서 생을 마감한다.

 

마티스의 삶과 작품을 정리하면 누구보다 삶에 대한 깊은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행복을 그려 나간 앙리 마티스. 그는 1,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적인 시기에 활동하던 예술가이다. 암울하고 비극적인 시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은 그리던 마티스는 때로 현실을 회피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끊임없이 활기와 생기가 넘치는 그림들을 그렸다. 심지어 나이가 들어 병이 들고 고통 때문에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을 때도 행복한 그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삶과 세상의 절망 속에서도 행복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예술가라 평가받는다. 특유의 편안하고 기쁨이 넘치는 마티스의 작품은 현재 인테리어 소품 등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세간의 비판에도 계속해서 작품 속에 세상에 없던 밝음과 순수함을 담아내려 한 앙리 마티스는 세상이 어둠을 맞이했을 때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란 것을 전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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