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초기 바로크 미술의 대표적 화가로 주로 종교화를 그렸지만, 이전의 종교화와는 다르게 극적인 장면을 골라 강한 빛과 어둠의 대조로 표현을 극대화했다. 이런 명암법인 테네브리즘 기법과 키아로스쿠로 기법은 카라바조가 주로 사용한 기법이며 후대의 화가 루벤스와 렘브란트 등 많은 화가에게 영향을 준다. 카라바조는 철저한 사실과 진지한 신앙에 의해 그림을 그렸고 후기 마니에리즘에서 바로크 미술을 개척한 거장이며 종교화뿐만 아니라 풍속화와 정물화를 그렸고 바로크 회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서양미술사에서 광기 어린 문제가 되는 인간으로 불리는 카라바조는 서른아홉 해를 사는 동안 민형사상 범죄를 수없이 저지른다. 그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후원자들이 도와주지만 끊임없는 그의 악행으로 도망자 신세가 된 카라바조는 어느 해변에 외롭게 죽는다. 서른아홉 이란 젊은 나이에 늘 불안하고 비참하게 삶을 살다 외롭게 죽은 천재 화가이며 광기의 화가인 카라바조에 대해 알아보자.
카라바조는 1571년 9월 29일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역의 작은 마을 카라바조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이고, 카라바조에서 태어나 카라바조의 미켈란젤로 메리시로 알려지며 본명보다는 이 출신지에서 따 온 카라바조라는 이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 페르모 메리시는 밀라노의 건축 장식 장인이었고 그는 가족과 함께 어린 시절을 밀라노에서 보내게 된다. 그러나 1576년 밀라노를 덮친 흑사병에 아버지가 죽고 그는 홀어머니와 형제들 사이에서 가난하고 불우한 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13살에 처음 붓을 손에 쥔 그는 스승인 페테르자노 밑에서 그림을 배우고, 18세가 되던 해 부푼 열정을 안고 전 세계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던 로마로 향한다. 하지만 매너리즘 풍조가 지배하던 로마에서 그가 밀라노에서 가져온 그림들은 큰 관심을 받지 못했고 그의 로마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일거리를 찾아 간간이 생활하던 그는 거리에 방랑자처럼 술, 도박, 싸움 등을 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온다.
그의 실력을 알아봤던 미술품 상인이 그에게 그림을 의뢰하였고, 그는 '황홀경의 성 프란체스코'를 그린다. 그의 그림에 만족한 주문자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 추기경'이 그를 정식으로 후원하기로 하면서 카라바조는 잠시나마 가난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는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며 가감 없는 사실적인 묘사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다. 카라바조는 그렇게 유명 인사가 됐지만 불안정한 성격과 자유분방한 사생활로 자주 싸움에 휘말리거나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생활을 계속한다.
매번 사건과 사고를 몰고 다니던 그는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별 탈 없이 넘어가게 되지만, 1605년 그는 싸움을 벌이다 순간 욱하는 감정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상대를 단검으로 찔러 살해하고 만다. 이 사건으로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된다. 카라바조는 후원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었고 주지도 않았다. 결국 그는 늦은 밤 변장한 채로 로마에서 탈출하고 그의 기약 없는 도망자 생활이 시작된다. 도주한 카라바조에게 교황은 "누구든 카라바조를 만나면 즉시 죽여도 좋다"는 명을 내린다. 그는 나폴리로 도주해 그곳 지역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을 이어 나가지만 그것도 잠시, 교황청의 수사망은 점점 좁혀왔고 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지면서 그곳에 더는 머물 수 없으리라 판단한 카라바조는 나폴리를 떠나 몰타섬으로 거처를 옮긴다. 다행히 몰타에는 아직 그의 만행이 알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명성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몰타 기사단의 일원이 되어 교황에게 면죄부를 받아 죄를 사면받을 계획을 세운다. 카라바조의 죄를 모르고 그의 명성만 알던 몰타 기사단은 그에게 그림을 의뢰했고 그는 '세례 요한의 참수'를 그렸고, 그 그림에 감동한 몰타 기사단은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린다. 그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결국 그의 범행이 몰타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후견인의 도움으로 몰타의 지하 감옥을 탈출한 카라바조는 시칠리아섬으로 떠나고 도망자 생활을 한다. 다행히 그의 후원자들은 추기경과 교황 앞에서 그를 변호했고 카라바조 또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모습이 담긴 작품 '성녀 우르술라의 순교'와 '세례 요한의 목을 쟁반에 들고 있는 살로메'를 그린다. 그는 교황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변론할 각오로 다시 로마로 돌아갈 결심 하지만 낯선 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길거리에 버려진다. 큰 상처를 입은 카라바조는 나폴리를 떠나 로마로 가는 도중 포르토 에르콜레에서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 군인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곧바로 체포된다. 그는 자신이 몰타기사단의 일원이라며 항의했지만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고 결국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털어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다. 포르토 에르콜레에서 받은 모진 고문에 상처는 곪아갔고 고열에 시달리던 카라바조는 해변에 쓰러져 홀로 외로이 죽음을 맞이한다. 카라바조는 그의 후원자들과 친구들의 계속된 청원으로 결국 사면을 받지만 1610년 7월, 그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자신의 삶만큼이나 비참하게 죽는다.
그가 죽은 지 310년 후가 되어서야 이탈리아의 미술사학자에 의해 그를 재평가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진 카라바조. 그의 작품에서 표현되는 강렬한 명암의 대비 과장 없이 표현된 인물들의 생생하고 사실적인 모습 속에서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강한 몰입감을 안겨주는 그의 표현 방식은 렘브란트, 루벤스, 벨라스케스 등 많은 화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들이 활동하던 이 시기를 바로크 시대, 그리고 이 시대를 연 장본인이 바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였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갖은 폭력과 반사회적 행동으로 논란을 몰고 다니던 카라바조는 근대 사실주의의 길을 개척하였고, 17세기 유럽회화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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