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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네덜란드 대표화가이며 빛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

by 르비쥬 2022.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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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에 대표적인 화가이자 가장 뛰어난 화가라고 인정받는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빛의 연금술사, 빛의 마법사라 불리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바라보는 핵심은 '빛'이다. 렘브란트는 바로크 미술의 창시자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주어 극적인 화면을 만드는 키아로스쿠로 기법과 테네브리즘 기법을 사용하여 마치 어둠 속에서 집중 조명을 받는 것처럼 밝은 부분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방법으로 작품을 그렸다. 또한 렘브란트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린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그려진 자서전'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자화상을 남겼는데 그 작품의 숫자가 100점 이상이라고 한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그의 삶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잘 묘사되어 있고 말년에는 자신을 탐색하듯 자화상만을 그렸다.

 

렘브란트는 1606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서쪽의 레이덴에서 제분업자의 아홉번째 아들로 태어난다. 렘브란트가 태어날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독립 전쟁 중이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네덜란드는 황금시대를 맞이한다. 격동의 시기였지만 네덜란드의 새로운 신흥부유층 상인들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렘브란트는 어린 시절 라틴어를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고 14살 레이든 대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학교 공부를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학교 교육을 그만두고 그림에만 열중한다. 그는 역사화가 스바넨부르크 밑에서 3년, 피터 라스트만에게 6개월간 그림을 배운다. 새로운 기술을 익힌 그는 1626년 고향 레이덴으로 돌아와 개인 화실을 연다. 원래 렘브란트는 역사화와 신화를 그리길 원했으나 당시 개신교 공화국이었던 네덜란드에는 종교나 역사,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주문할 교회나 궁정이 없었다.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그리며 그림 연구에 매진하고 네덜란드의 중심지인 암스테르담으로 향한다. 그는 그곳에서 초상화가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하였고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서 입지를 다지게 한 작품 의뢰가 들어온다. 당시 네덜란드는 경제적으로 전성기 황금기를 맞이하면서 각종 전문 직종들과 부르주아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초상화와 집단초상화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1632년 외과 의사 조합이 주문한 조합원의 그룹 초상화인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그리게 된다.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외과 의사 조합원의 그룹 초상화인데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듣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초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을 나란히 배치하지 않고 툴프 박사 강의를 듣는 순간을 포착하여 렘브란트 특유의 빛과 어둠의 대조로 그림을 공간감과 생동감 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또한 렘브란트 특유의 빛과 어둠을 잘 배치하여 극적인 장면을 잘 만들어 내어 관람자를 그림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효과가 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많은 부유한 상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네덜란드 황금기의 중심에 선 화가가 된다. 성공한 그는 1634년 명문 가문의 딸 사스키아와 결혼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부와 명성을 누린다.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져 많은 작품을 의뢰받은 그는 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성공적인 삶을 누리지만 자신의 화풍에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성공에서 멀어지게 된다.

 

1642년 완성한 '야경'이란 작품이 결정타였다. 현재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어 불멸의 걸작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자경단 협회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 렘브란트의 새로운 시도였다. 당시 기념사진 같은 단체 초상화에 만족하지 못한 렘브란트는 명암 효과를 주는 식의 대담한 구성과 역동적인 구도로 '야경'을 완성한다. 새로운 시도였지만, 이 그림은 혹평받는다. 이유는 주문자들이 같은 돈을 내고 그림을 의뢰한 것인데 누구는 주인공처럼 누구는 배경처럼 묘사되어있고 당시의 그림 구조와 크게 어긋나기 때문이다. 같은 해에 경제적인 버팀목이었던 그의 첫 번째 아내 사스키아가 건강 악화로 죽게 되면서 경제적 부담이 커졌고 당시 사람들의 선호도가 밝고 화사한 그림으로 바뀌면서 렘브란트는 서서히 몰락한다. 다행히도 두 번째 아내인 헨드리키의 내조로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발전을 거듭하지만, 사치스럽고 규모 없는 렘브란트의 생활로 경제적으로는 어려워진다. 결국 1656년에 파산 선고를 하게 되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저택과 미술품마저도 전부 팔아야 했다. 1663년에는 두 번째 부인 헨드리키도 세상을 떠나고 1668년엔 아들인 티투스마저 세상을 떠난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점점 심해졌고 나중엔 첫 번째 아내의 묘지 터까지 팔아야 했다. 부와 명성과 가족, 모두를 잃었지만 렘브란트는 그림을 멈추지 않았고 그는 마지막까지 자화상으로 자신의 내면을 표현했다. 마지막 그의 자화상을 보면 우스꽝스럽게 웃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서 행복함보다는 고뇌와 번뇌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의 삶이 마냥 행복한 삶은 아니었다는 것도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자화상에서 삶의 끝에선 허탈함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1669년, 고독한 예술혼을 붙잡고 초라하게 늙어가는 렘브란트는 유대인 구역의 어느 허름한 집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다.

 

초상화가로서 명성이 높아지고 가장 빛나던 때를 보냈지만 렘브란트는 활동 말기로 갈수록 점차 제작하는 작품의 수가 줄어들었으나, 새로운 표현 방식을 시도하며 그의 작품은 조금씩 발전했다. 비록, 미술품을 사들이는 등 사치스러운 그의 생활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지만 그림만큼은 서서히 발전했다. 화법은 더 대담해지고 인물의 표현은 절제되었다. 이 시기를 비평가들은 렘브란트 미술의 절정기로 여긴다. 오늘날까지도 위대한 화가라 칭송받는 렘브란트는 빛과 명암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화가이고 바로크 회화의 완성자라 할 수 있을 만큼 빛과 어둠을 사용함에 있어서 대가였다. 그래서 오늘날 렘브란트를 '빛의 마술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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