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뒤에 빛난 천재 화가 반 고흐는 37년 짧을 생을 살고 2000점이 넘는 그림을 남겼다. 평생을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린 불행한 천재 화가 빈센트 빌럼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 노르트브라반트주의 작은 마을 준데르트에서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흐에겐 형이 있었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고흐가 장남이나 마찬가지였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목사 아버지와 미술적 소양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고흐는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유년 시절을 보낸다. 고흐 아버지의 형제 넷 중 셋은 미술상이었다. 이렇게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 미술적 소양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자란 고흐는 태어나면서부터 예술과 종교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랐고 이런 환경이 고흐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고흐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다. 고흐의 집안에는 정신 병력이 있었는데 아마도 정신장애나 발작을 일으켜 학교를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고흐는 집에서 가정교사와 아버지에게 수업을 받았고, 미술적 소양이 있던 어머니는 고흐에게 그림을 가리켰고 집 안엔 늘 음악과 독서가 있도록 했다. 열한 살 때 고향에서 가까운 신학교를 다녔지만 집을 떠나 기숙 생활을 했던 고흐는 적응하지 못했다. 열세 살이 된 고흐는 브라반트 지방에 처음으로 생긴 개신교 중등학교로 옮기면서 하숙 생활을 시작하였고 처음으로 중등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받게 된다. 이 학교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미술이 수업 중 하나로 도입되어 있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파리에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화가 콘스탄트 코르넬리스 하위스만스(Constant Cornelis Huijsmans, 1810~1886)가 이 학교의 미술 교사였는데 이때 고흐는 하위스만스 밑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미술 수업을 받는다. 성적도 좋았고 그림도 잘 그렸던 고흐는 3학년이 되기 전 돌연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온다.
얼마간 집에서 지낸 고흐는 열여섯 살이 되던 해 헤이그로 떠난다. 헤이그에는 '구필&시(Goupil&Cie)' 화랑의 공동소유자이자 지점을 관리하던 삼촌이 있었고 고흐는 삼촌 가게 직원으로 들어간다. 화랑에서 그림을 사고파는 '화상'으로서 일을 잘 해내던 20대의 고흐는 구필 화랑의 런던과 파리 지점을 돌며 잠시나마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듯했으나 갑자기 미술상 일에 흥미를 잃고 다시 방황하기 시작한다. 런던에서 화상으로 일할 때 고흐는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을 보고 상당한 충격과 감동을 하였고 밀레의 그림은 고흐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고도로 산업이 발전한 런던에서 본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며 그림을 사고파는 일을 그만두고 성직자가 되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고흐는 정신적으로 불안했고 성직의 길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행복했던 고흐는 그의 방황을 지켜본 동생 테오의 제안으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고흐는 왕립 예술학교에 등록하지만 형식화되어있던 미술 수업은 그에게 맞지 않아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만둔다. 이후 고흐는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따라 그리며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의 소재는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과 시골집이었고, 고흐의 유명한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은 어두운 불빛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시골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어두운 색채 위주로 그린 소박한 이 그림은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려 한 고흐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이후 그는 대도시 파리에서 당시 대세였던 인상주의를 대면하면서 좀 더 밝고 순수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고갱과 마찬가지로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일본 판화에 깊게 빠지며 진한 배경 선과 얕고 단순한 채색의 그림을 만들어 나간다. 이때 고흐의 그림을 보면 그림자 없이 단순하게 채색된 화면과 진한 배경 선을 찾아볼 수 있다. 점차 밝은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한 고흐는 어두운 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꼈고 그는 파리에서 벗어나 남쪽 시골 마을 아를로 떠난다. 여기서 그는 200점이 넘는 많은 그림을 그리며 형태를 단순화하고 색은 실제보다 강조시키는 본인만의 화풍을 완성한다.
아를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고흐는 '노란 집'이라 불리는 곳을 빌리고 여러 화가에게 화가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하지만 그런 제안에 응했던 사람은 유일하게 폴 고갱뿐이었다. 함께 지내자는 제안을 고갱이 받아들이자 외로웠던 고흐는 그와의 우정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해바라기를 그려 고갱의 방을 장식해둔다. 도착한 고갱은 이 그림을 보며 그의 천재성에 감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밀레의 영향을 받아 있는 그대로를 자세하게 관찰하고 표현했던 고흐와 달리 기억에 의존하여 창의적으로 표현하길 좋아했던 고갱은 함께 지내는 동안 수많은 갈등을 빚는다. 그들의 갈등을 엿 볼수 있는 그림으로 아를에서 고흐가 친하게 지낸 카페 여주인 지누의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고흐는 그녀에 대한 감사한 마음에 그녀를 교양있는 여성처럼 그려냈다. 책을 펼치고 생각에 잠긴 모습과 날카로운 턱선에서 교양 있는 여인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고갱은 지누를 마치 남자를 유혹하는 창녀 같은 인상으로 그려냈다. 둥그스름 한 얼굴과 풀린 눈에서 간사함과 천박함이 엿보인다. 리얼리즘적이었던 고흐는 이런 고갱의 그림 창작 스타일을 왜곡이라고 생각했으나 처음인지라 그냥 넘겨버리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이 결정적으로 폭발한 그림은 바로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였다. 고흐의 그림에서 인물 들은 거의 대부분 뚜렷한 눈동자를 보여주지만, 고갱이 그린 고흐는 흐리멍덩한 모습으로 보였다. 고흐는 고갱이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거라고 조롱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고흐는 술집에서 고갱과 술을 마시다가 술잔을 집어던지는 걸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결국 고갱이 온 지 두 달이 약간 지난 1888년 12월 23일,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고갱의 회고에 의하면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며 나타나서 자신을 찌를 듯해 보였지만 노려보기만 하고서는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 뒤에 귀를 잘라버린 걸로 보이며 잘라낸 걸 가끔 만나던 사이인 라셸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었고 그걸 보고 기겁한 라셸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왜 하필이면 귀를 잘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고갱의 회고가 맞는다면 고갱을 찔러버릴 의도였던 것 같지만 고흐는 정신발작을 일으키고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자른다. 이 사건을 끝으로 고갱은 타히티 섬으로 떠나 버리고 고흐는 생레미의 정신 병원에 입원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병과 싸우기라도 하듯 걸작들은 그려내는데 '별이 빛나는 밤'과 '사이프러스 나무'가 대표작이다. 파리 시절부터 고흐는 압생트라는 술을 즐겨 마셨는데 이 술은 가격이 싸고 상당히 독한 술이다. 이 술에는 '테르펜'이라는 물질이 있는데 이 물질은 황시증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있다. 황시증은 사물이 노랗게 보이고 빛이 울렁거리게 보이는 증상으로 고흐의 걸작 '별이 빛나는 밤'에서 표현한 별빛과 달빛의 붓 터치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후 고흐가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퇴원하자 언제나 고흐를 응원해주고 경제적인 지원을 해준 동생 테오는 파리에서 가까운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 오베르에 집을 마련해준다. 오베르에는 화가들과 교분을 나누던 '폴 가셰'라는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천연 약초를 이용하여 고흐의 간질과 조울증을 치료했지만, 단순히 환자를 진정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던 가셰의 치료는 고흐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890년 7월 27일 쇠약해진 몸과 정신을 이겨내지 못한 그는 오베르의 밀밭에서 리볼버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총알은 심장을 빗나가 즉사하진 않았지만, 이틀 후 총알에 의한 감염으로 결국 숨을 거둔다. 고흐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테오도 정신병이 생겨 6개월 뒤 죽게 되고 형제는 나란히 묻힌다.
살아있을 당시 화가로 실패하고 평생을 빈곤과 정신병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로 끝낸 우울한 삶이지만 붓을 놓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며 남긴 2000개가 넘는 작품들은 현대 미술의 단단한 기초가 되고 있다. 만약 그가 장수했더라면 말년에 명성을 누렸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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