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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빈을 대표하는 황금빛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by 르비쥬 202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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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을 대표하는 황금빛의 화가, 클림트. 그는 격변하는 시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변하지 않았던 도시 빈에서 1862년에 태어나고 빈에서 살다가 1918년 빈에서 죽었다. 클림트의 삶과 예술 활동의 주 무대인 빈은 그의 그림에 스며들어가 있다. 클림트는 동시대 어떤 화가들과도 닮지 않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으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하였고, 그 이전 전통적인 화풍과도 다르면서 현대 미술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낸 아르누보 미술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빈 교외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이자 맏아들로 태어난다.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안 태생의 금세공인으로 당시 제국의 이주민 정책에 따라 빈 인근으로 이주한다. 어머니 안나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지만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았기에 꿈을 이루지는 못한다. 금세공업으로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기에 가정형편은 넉넉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금세공업만으로 7남매를 먹여 살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황실 공예 학교에 들어간다. 다행히도 아버지의 손재주를 물려받은 클림트는 간간이 학교에서 받아온 일거리로 푼돈을 벌어서 생활비에 보태기도 한다. 그의 나이 17세, 아직 학생이던 클림트는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생 에른스트의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예술가 컴퍼니'를 설립하고 직업 예술가의 길을 시작한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명으로 링슈트라세를 중심으로 한 빈의 도시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고 있을 시점에 예술가 컴퍼니를 설립한 클림트는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1800년대 후반 빈의 시대적 배경이 예술가 컴퍼니를 살려낸 셈이다. 금세공인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은 클림트와 에른스트는 일찍부터 재주를 인정받았고 스승인 라우프베르거 교수를 통해 꾸준히 일감을 받는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이른 나이에 직업 예술가의 길에 뛰어든 클림트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잘 잡았고 점차 화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884년 빈에서 최고의 역사 화가로 꼽히던 한스 마카르트가 갑자기 사망하자 그는 그리던 엘리자베트 황후 침실의 벽화를 완성할 사람이 필요했다. 때마침 예술가 컴퍼니에 의뢰가 들어오고 벽화를 완성한 예술가 컴퍼니는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예술가 컴퍼니가 서서히 명성을 얻게 되어 링슈트라세에 새로 들어선 부르크 극장의 천장화 의뢰를 받는다. 황제의 입구와 대공의 입구, 두 곳의 천장화를 세 사람이 나누어 그린다. 그 가운데 클림트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클림트와 에른스트, 프란츠 마치의 모습이 관객으로 등장한다. 천장화는 2년이 걸려 1888년에 완성되고 천장화를 그린 세 사람은 황제 메달을 수상한다. 천장화를 잘 그리는 젊은 예술가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빈에 퍼져나갔고 예술가 컴퍼니는 빈 미술사 박물관 벽화 의뢰를 받는다. 빈 미술사 박물관 벽화는 대형 프로젝트로 2년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한다. 클림트는 빈 미술사 박물관 벽의 여섯 부분으로 나눠진 아치와 기둥 사이 공간을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리스와 이집트, 중세 후기의 예술 이렇게 세 개의 세트로 구성해 표현했다. 특히 황금빛 의상을 입은 베아트리체나 관능적인 이집트 여신의 모습에서 클림트만의 개성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으며 그가 맞이하는 황금시대를 미리 예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클림트는 부르크 극장의 천장화와 빈 미술사 박물관 벽화의 연이은 성공으로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경제적 성공과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성공의 기쁨도 잠시였다. 그의 나이 서른에 갑작스레 아버지 에른스트가 뇌출혈로 사망하고, 같은 해 12월 동생 에른스트가 심근경색으로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동생 에른스트가 죽기 직전 그의 딸 헬레네가 태어나고 연달아 찾아온 비극으로 인해 클림트는 가장이 되어 가족을 부양하게 된다. 이후 평생 자신도 아버지처럼 60세가 되기 전에 뇌출혈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안고 살게 된다.

과거 지향적인 태도로 영원히 과거에 머무는 듯한 빈에서도 새로운 예술에 대한 갈망이 일어난다. 클림트를 비롯한 스물세 명의 예술가들이 '오스트리아 예술가 분리파 동맹'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였고 클림트가 회장으로 추대된다. 빈 분리파의 목표는 빈의 고답적인 역사주의에 반기를 들고 당시 유럽을 휩쓸던 '모더니즘 예술'의 새로운 바람을 빈에 들여오는 것으로, 이들의 탄생은 큰 화제를 일으킨다. 빈 분리파는 빠르게 인기를 얻었고 다른 예술가들도 빈 분리파가 일으킨 혁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클림트는 1896년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화를 의뢰받게 된다. 의뢰받은 부분은 대학의 주요 학문인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그림이었다. 이 중 '철학'의 스케치를 제7회 빈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한다. 확연하게 바뀐 스타일과 그림 속에 담긴 메시지에 관계 당국이 발칵 뒤집히고 빈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빈 대학 교수 87명이 클림트의 천장화 제작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지만, 클림트는 '이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일일이 설명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박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철학'이 제4회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며 클림트 예술의 가치를 증명해 주게 된다.

클림트는 1901년 완성된 '유디트'의 배경에 처음으로 금을 얇게 펴 바른 금박 기법을 사용했다. 이후 베토벤을 주제로 한 벽화 '베토벤 프리즈'에서 금박 기법과 모자이크 기법을 사용해 대중들에게 선보였고, '베토벤 프리즈'는 금을 칠한 벽화라는 사실만으로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클림트의 '황금시대'는 이렇게 시작된다. '베토벤 프리즈'를 통해 황금시대를 연 클림트는 이듬해 1903년 이탈리아 라벤나를 방문한다. 라벤나의 성당에서 마주한 6세기 비잔티움 모자이크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압도당하고, 이 모자이크들은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황금빛 모자이크에서 평면이 함축하고 있는 놀라운 상징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새로운 예술의 길을 찾게 된다. 고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황금으로 빛나는 걸작은 즉각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고 황금시대의 절정에 이르며 클림트는 황금시대의 여러 대표작을 남긴다. '키스', '다나에',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등을 비롯해 '물뱀 1', '프리차 리들러 부인의 초상' 등 그의 작품은 황금시대 전성기를 빛냈다.
1907년과 1912년 사이 클림트의 그림에는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는 '키스'를 기점으로 거의 10년간 자신을 사로잡았던 황금시대에서 벗어나고  두 번째 '아델레 브로흐-바우어의 초상'에서 드러난다. 황금 대신 동양풍의 장식과 화려한 색상이 가득한 이 그림을 통해 클림트는 황금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는 클림트의 세 작품에 모델로 등장하며 화가와 어떤 관계에 있었을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1912년 그는 요제프슈타트의 아틀리에를 떠나 빈 외곽 히칭 지역으로 작업실을 이전한다. 이곳이 그의 마지막 거처인 클림트 빌라이다.

클림트는 아버지처럼 예순이 되기 전에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매일 산책을 하며 건강을 챙겼다. 하지만 결국 1918년 뇌출혈로 쓰러진 클림트는 2월 6일,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5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작업 중이던 '신부'는 미완성 상태로 그의 유작이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면서 빈 분리파와 빈 공방의 활동도 종말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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